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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업적과 운이 좋았던 유럽

by 레아2022 2022. 12. 6.

칭기즈칸은 몽고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42세인 1206년 몽고의 크고 작은 부족들을 통일하고 최고 지도자인 칭기즈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복전쟁을 벌여 서하, 금, 서요, 이슬람 세계의 최강대국인 호라즘, 러시아 등을 차례로 토벌해 복속시켰다. 그는 정복한 땅들을 네 아들에게 나누어 줘 후일 4 한국의 기초가 되도록 했다.

 

칭기즈칸은 오랫동안 야만적 정복자로 묘사됐으나 최근에는 뒤어난 전략가로 재평가하는 분위기이다. 정복 과정 자체는 잔인하고 야만적이었으나, 일단 정복된 지역에 대한 통치는 현명하고 어질었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이 지시한 금기사항을 기록한 몽고 대법전은 당시 기준으로 놀랄 만큼 진보적인 것이다.

 

이 법전은 여성 납치 금지, 강제결혼 금지, 고문 금지, 재산이나 가축 도둑질 금지 등을 규정하고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명시했다. 칭기즈칸은 이와 함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인종에 관계없이 의사, 과학자, 예술가, 기술자, 외국어 능통자 등 특기를 가진 사람을 적극 회유하고 우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가 전 세계 인구의 50%를 차지하는 인류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전략과 함께 이민족을 아우르고 융합시킬 수 있는 현명한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그는 위그르족, 투르크족, 타타르족, 유렵인 등 피부 색깔에 따라 인종을 차별하지도 않았다. 충성심이 강하고 능력이 있으면 아무런 차별 없이 등용하고 실적에 따라 승진시켰다. 군도 마찬가지였다. 충성심이 강한 민족, 특히 투르크족과 위구르족 청년들 가운데는 몽고군에 자원해 몽고제국 건설의 견인차가 된 경우가 많았다. 또 몽고에 복속된 모든 지역 젊은이 열명 가운데 한 명은 몽고군에 징집됐다는 기록도 있다.

 

일단 몽고군에 입대한 병사들은 가족을 데리고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이 이민족의 문화와 예술을 존중하는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문맹이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설득력을 얻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과 몽고 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그는 문자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확인된 메모지는 그가 도교 철학서를 독해할 수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서유럽이 몽고군의 살육전에 희생되지 않았던 것은 순전한 행운의 결과였다. 1241년 여름, 폴란드와 헝가리를 손에 넣은 수보타이는 이태리와 오스트리아, 독일을 공략할 태세였다. 그는 겨울이 되길 기다렸다. 겨울이 되면 강이 얼어붙어 기마부대를 신속히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같은 해 크리스마스가 지나가 강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몽고군은 알프스 산을 넘어 이태리 북부를 공격할 찰나였다.

 

수보타이가 보낸 또 다른 정탐 부대는 다뉴브 계속을 통과해 비엔나 문턱에 다다라 있었다. 서유럽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 긴급 전령이 온 것이다. 칭기즈칸의 아들로 몽고제국의 2대 황제인 오가타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황제가 죽으면 반드시 황족들이 모여 새 황제를 뽑아야 한다는 게 칭기즈칸이 만들어 놓은 불문율이었다. 칭기즈칸은 1226년 가을 몽고의 원정 2 전쟁 참가를 거부하는 서하를 응징하기 위해 서하의 수도 닝샤를 포위한 채 전투를 벌이다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장군들은 그의 시신을 몽고로 보내 장사 지내기로 했다. 몽고군은 그의 장례 행렬을 목격한 사람은 모조리 현장에서 죽여버렸다. 그가 묻히는 곳을 비밀에 붙이기 위해서였다. 그가 아끼던 말 40마리도 함께 매장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근 그가 묻힌 곳이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게 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시신 운구 행렬을 엿보다 발각된 사람은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현장에서 모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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